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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현대미술: 1960~1970 아방가르드18

by nikaj 202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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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1960~1970 아방가르드

 

1962년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야기된 위기는 세계를 핵전쟁 일보 직전으로 몰아갔고 전쟁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공포스러운 균형은 동구와 서구라는 두 진영으로 전면적으로 대치했으며 누구든 자신의 진영을 선택해야 했다.

이렇게 조직화되는 세상 앞에서, 미술은 자신의 광란의 질주를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회화와 조각의 전통적인 미적 범주는 폭발했고, 생생한 볼거리가 지원군 역할을 했다. 건축과 디자인도 조력자가 되었다. 미술은 과도할 정도로 그 특수성을 주장했으며, 이 특수성은 미술에 모든 권리 특히 파멸의 위험을 안고도 영역을 확장시킬권리를 부여했다. 미술가의 태도나 작품의 콘셉트가 중요해지고, 미술의 유희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결과를 낳았고, ‘자아의 진열보다 우세했다.

 

어떠한 운동도 아방가르드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상황과 맥락, 그리고 때로는 불분명하게 유동하는 그물망의 문제였다. 노선을 지키는 것보다 모든 수단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키네틱 아트, 옵아트

 

콜더의 ‘모빌’, 혹은 ‘스태빌의 거대하고 평온한 줄기 형상들은 놀라운 운동적 소요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매우 시각적인 동시에 매우 가시적인 미술적 혁명에 의해 고양된 새로운 사고가 모든 진보의 영역에서 나타났다. 여기저기에서 반목공장이 이자 반기술자인 미술가들로 구성된 그룹이 생겨났다.

1955년에는 바사렐리의 주도하에 파리의 드니즈 르네 갤러리에서 ‘움직임’‘움직임’ 전이 열렸다. 바사렐리는 카셀에서 열린 첫 번째 도쿠멘타에 즈음하여 같은 해 <노란 선언문>을 출판, 이 선언문에서 그는 미래는 움직이는 감동적인 새로운 조형미로서 행복을 우리에게 마련해 두었다.”라고 말했으며, 문화적 책임에서 미술을 해방시켰다.

도쿠멘타(Documenta):독일의 카셀에서 4년마다 열리는 국제 전시회

 

독일에서는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제로’ 그룹이 결성되었다. 이 그룹은 나치즘의 치명적 죄악 때문에 유폐된 독일을 침묵에서 대담하게 끌어낸 최초의 미술 운동이었다. 하인츠 마크와 오토 피네, 귄터 위커는 새로운 독일 미술가 세대를 위해

현대성의 국제적 각성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했다.

하인츠 마크는 전기 발전기와 빛을 발하는 저부조 작품 외에도 현대화된 원시 의식을 위한 웅장한 무대 장식을 구상, 오토 피네는 빛의 안무와 불과 연기의 회화, 그리고 바둑판무늬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귄터 위커는 표면에 일정하게 못을 박아

프로젝터의 광선발레에 투사시켰다. 전후 다시 깨어난 독일 최초의 위대한 미술가였던 이들은 세계적 야심으로 고무되었고 독일 미술의 국가주의적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네덜란드에서도 1961년 눌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데스틸이 세운 전통을 되살려 운동적인 시각적 사물을 창조해

냈으며, 표현주의 추상예술을 추구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수호적 인물 폰타나의 축복 속에 밀라노에서 그루포T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1959년에서 1966년까지

지각에 관한 ‘게슈탈트’‘게슈탈트’ 이론을 형성하였다. 동일한 설치작품 속에 매우 이질적인 감각적, 촉각적, 시각적 지각의 요소를 섞어 넣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이 총체미술의 장치들은 보리아니의 스트로보스코프의 방에서 빛을 발했다.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그루포N 또한 끊임없는 탐구라는 명칭으로 대규모의 옵아트와 키네틱 아트 전시회를 여는 영광을 누렸다. 이 그룹은 순수한 시각적 미학의 기하학적 규칙들을 받아들임으로써 1931년부터 유럽 아방가르드로 입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인 적이 있었다.

옵아트(Op art) : 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하여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미술

키네틱 아트(Kinetic art) : 작품 그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넣은 예술 작품의 방식. 최초 작품으로 뒤샹이 1913년에 자전거 바퀴를 사용하여 제작한 <모빌>이 꼽혀진다

 

 

훌리오 레 파르크,<연작 31 D nº 2/2>,1957~1970 개인소장, 콜라주 훌리오 레 파르크는 캔버스나 단순한 입체 위에 14색계의 무한한 가능성과 기초적인 그물눈스크린 전개를 표현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행하였다. 구조와 움직임, 빛, 또는 환경에 관한 이러한 탐험을 통해 시각 미술의 객관적 법칙의 효율성과, 야릇한 매혹이나 황홀함의 기쁨이 결합되었다. 방법상의 철저한 엄격성과 정확한 표현은 감미로운 색의 풍요로움을 창출해냈다. 이 풍요로움은 놀라운 파동의 떨림과 인상적인 3차원적 환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Ph.ⓒ Galerie Denise René, Paris/T ⓒADAGP,1999

 

폴란드 출신의 피요트르 코발스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통을 이어받아 미술과 과학의 경계를 뛰어넘으려 하였다.

그는 극히 자유롭고 광범위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시간과 공간, 상대성, 대칭, 거울, 빛과 같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타임머신>이 ‘시간의 즉각적인 물질성을 전달하고, 그것을 조작하여 뒤엎어버리는미술적 도구가 될 수 있기를 원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타임머신>은 시간을 흔적이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시간의 감각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세계로서 다루는기계였기 때문.

 

스위스 출신 미술가 장 탱글리는 1953년 파리로 이주, 익살스럽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한 기묘한 기계 작품들을 통해 움직임을 축제로 승화시켰다. 이 새로운 다다이스트는 1952년 선언문을 통해 붓과 팔레트, 캔버스, 그리고 캔버스 틀의 구태의연한 낭만주의를 버리고 기계에 흥미를 갖는 것이 미술가의 소임이다.”라고 외쳤다. 수선스런 상상적 세계의 기계공이라 불리는 탱글리는 계속해서 조롱기 어린 태도를 유지했는데 그 필두가 1960년 17일 제작된 최초의 자멸 미술품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내부에 설치되었는데, 이 작품은 풍자인 동시에 뉴욕에 대한 웅장한 오마주이기를 표방했다.

 

누보리얼리즘

 

누보 리얼리즘은 아방가르드 전술의 최후 현신으로서, 1960년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를 중심으로 여러 미술가들이 서명한 선언문을 통해 탄생하였다. 누보 리얼리즘은 실제로 매우 다양한 인물들을 결집시켰으며, 그들은 3년 동안 도용이라는 주제의 선상에서 오브제의 모험을 공유하였다.

 

이브 클랭은 1957년 1월IKB(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 International Klein’s Blue)라는 명칭의 군청색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음 해, 그는 비물질의 화가답게 무결한 빈 공간을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에 전시했다. 1960년에는 그의 첫 번째 ‘인체측정’ 작품이 선보였는데 이는 폭격으로 히로시마 성벽에 영원히 새겨진 육체의 그림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세속적 의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여성 붓들이 몸을 움직임으로써 이루어진 ’ 이 ‘ 인체측정’ 을 통해, 미술의 대상은 관능적 의례로 변모했다. 몸에 미리 물감을 칠한 나체의 모델들이 만들어 낸 뒤틀린 흔적이 ‘ 수의-시트 ’ 위를 경건히 수놓았으며, 이것은 문명과 마찬가지로 회화 역시 멸망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브 클랭은 용접기로 캔버스를 공격하기도 하고, 1960년에는 교묘한 포토몽타주를 통해 가상의 ‘ 빈 공간 속의 도약 ’ 을 향하기도 했다.

포토몽타주(Photomontage) : 1915년 독일이 다다이스트 하트필드가 사진의 단편들을 종이에 오려 붙여 만든 기법을 말한다. 이후 많은 작가가 포토몽타주를 통해 시대를 비판하고 증언했다.

 

아르망 역시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에서 가득 참의 전시회를 열었다. 갤러리는 쓰레기 가득 차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갤러리의 문 뒤에 남은 것은 소비 사회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이었다.

예비적이며 생태학적이고 전조적인 그의 집적 작품은 사물의 용도를 부정하고 오직 그것이 만들어내는 광경만을 보여주었는데, 그렇기에 슈퍼마켓의 진열대와 뒤죽박죽 섞인 잡동사니는 형태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되고 상품의 경제적 가치는 반복을 통해 파괴되었다.

마침내 아르망은 분노하여 악기와 같은 신성한 사물에 덤벼들었는데, 그는 도끼와 가위, 재단기를 이용하여 격렬한 몸짓으로 악기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아르망, <쇼팽의 워털러>,1962년,MNAM,조루주 퐁피두 센터, 파리, 아상불라주, 186×300×48Cm 1961년부터 아르망의 ‘분노’는 도용작업의 행보를 격화시켰다. 이러한 행보는 ‘도장자국’에서 시작되어, ‘쓰레기통’으로 연장되고,‘집적’작업을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베르나르 라마르슈 바델은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외연을 강조하였다. “아르망은 사용 설명서와 교환 가치의 광신자들을 후퇴의 욕망과 철저한 파과의 업적에 대조시켰다.” Ph. L. Joubert ⓒ Photeb/T ⓒADAGP,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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