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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현대미술: 전후~1940년대 15

by nikaj 202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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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전후 미술1(1940년대 중후반)

 

 

 

전후, 40년대 중반 거장들의 활발한 움직임.

 

파리 미술계의 동요 

해방된 회화의 획일적 상황이 무너지기 이전인 1948, ‘전통을 향한 호소는 선택된 미술의 땅인

프랑스의 결정적인 역할을 부각. 프랑스는 한 세기 동안 인상주의와 큐비즘이라는 중요한 두 운동을 태동시킨 곳이나 추상과 표현주의 배제되었다.

 

1947년 파리에서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에서 온 젊은 화가들이 코브라 그룹을 결성.

시적이며, 성상 파괴적인 회화의 동물인 코브라의 독은 창조되는 대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조의 행위에 우선권 부여.

코브라 그룹은 맹렬한 활동을 펼쳐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많은 전시회와 간행물을 선보였다. 1953년 아스게르 요른과 고트르몽은 기 드보르와 함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시초를 마련. 1948년 보르뒤아스와 리오펠을 중심으로 한 캐나다의 오토마티스들은 총체적 거부를 출판하였는데, 그 내용은 무의식에 의해 야기되는 철저한 추상을 역설 한 것 이었다.

조르주 마티외는 서정적 추상의 떠들썩한 주인공이 되어 작품 속에서 한 문명 전체의 열망과 지식, 미학을 승화시켰다.

 

화상과 미술관들 또한 활약하기 시작

몬드리안의 회고전을 비롯, 비범한 색채 감수성을 지닌 세르게이 폴리아코프를 발굴, 그는 기하학적 엄격성이나, 기호와 동작의 서정적 충동과 모두 거리가 먼 새로운 추상의 주창자가 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가장 반순응주의적인 미술적 형태의 진영에 있던 미술관 또한 참여함으로 전투적이고 현재적인 것이 되었다. 풍부한 컬렉션 보존이라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살아 있는 미술과 한시적인 전시회에 문을 열기 시작한 것.

미술관들은 사건의 장소가 되었으며 서로 부각되기 위해 다투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유럽의 부활

 

프랑스의 미술기관들은 아라공을 수장으로 하는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폐허가 된 미술계 한복판에 내던진 폭탄과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식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1948년 가을 미술전을 열었고, 앙드레 푸주롱과 더불어 해방기의 국가 미술상을 받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해 예리한 풍경화와 아틀리에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실주의를 보여주던 프랑시스 그뤼베르가 사망하였다.

 

참상묘사주의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것도 역시 1948년으로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뚜렷한 검은 윤곽의 최초의 굶주린 실루엣은 이론 없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레나토 구투소가 신화로 변형한 일상적 광격을 통해 찬사를 받았다.

독일의 막스 베크만은 1950년 사망할 때까지 간결하고 큼직하게 구성한 표현에 충실했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더불어 인간의 표현에서 완전히 새로운 면모의 사실주의가 나타났다. 이 사실주의는 절망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 속에 인간의 모습을 위치시켜 제멋대로 비틀고 벗겨냈다. 그리고 그 공간을 가로지는 것은 음험한 잠식성의 시각적이 독을 품은 들큰들큰한 색이었다. 1953년과 1960년의 뛰어난 연작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인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에 공격을 가했다. 베이컨은, 자신은 작품의 기계적 재현과 발터 벤야민에게서 비롯된 상상 미술관의 신성화 효과를 통해서만 작품을 인식할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도발과 신성 모독을 늘려갔다. 그는 교황을 허공 속에 던져놓고 교황의 평온함을 공포의 외침으로, 교황좌를-전기의자나 고장 난 승강기의 뼈대가 아니라면-패러데이 차단판으로 변형시켰다. 어찌되었던, 교황의 고귀한 형상은 육체와 공포 고독에 지나지 않았다.

 

 

프란시스 베이컨,<울부짖는 교황 또는 이노켄티우스 10세>,1953년, 윌리엄 버든 컬렉션, 뉴욕 벨라스케스작품의 재구성. 벨라스케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는 “너무나 진짜 같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찬탄을 받는 만큼 비난도 받았던 그 작품은 결코 전통적인 계보에서 나온 작품이 아니었다. 대중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 작품은 거의 은밀한 성격을 띠고 고독한 화가들의 독점적 관심사가 되었다. 티티엥의 말에 따르면, 영광의 절정에 있던 벨라스케스는 인간 계층의 가장 높은 자리에 다다랐던 그의 특별한 후원자와 대등하게 소름끼치는 정면 맞대결을 한 것이다. 베이컨의 숭배의 표현 중 하나를 빌자면, 인물을 놀랍도록 고립시키는 그림 속에 깊은 고독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벨라스케스에서 베이컨의 작품까지 한결같은 ‘집중’이 나타난다. 그것은 화려한 치장과 변장한 모습의 인간, 사치스럽게 넘쳐나는 천과 레이스 속에 뒤덮인 육체 너머의 것이거나 그것들에 기인하는 집중이다. 공식적인 초상화란, 그림의 기술을 측정하는 이미지이자, 젊은 시절의 베이컨이 1920년대의 베를린에서 대면했던 가장을 통해 미술사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통행증에 지나지 않았다. 이 그림에서 위대한 벨라스케스가 사용했던 시간과 공간에 화답하는 것은 베이컨의 격렬한 흥분과, 죽음을 향해 열린 뚜껑 문을 통해 아래로 떨어지는 한 사형수의 울부짖는 흔적이다. Ph. ⓒ AKG, Paris ⓒ ADAGP, 1999

 

사실주의의 확실성 및 전쟁 이전의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에서 멀어진 유럽 미술은 독일 점령후 해방을 전망하면서 재발견된 허약한 개인주의에서 그 쇄신의 힘을 얻었다. 가장 강한 몸짓의 추상에서 가장 극적인 구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미술가들이 규범을 벗어나 자유롭게 미래의 형태를 창조했다.

 

피에르 술라주는 흔적이나 한 순간의 표현보다는 시간을 초월한 창조자의 충동하는 실재에 즉각적인 애착을 보였다. 느린 몸짓은 그가 긁거나 칠해 보인 회화적 재료의 사용을 돕는 도구를 제어하였다. 데생과 회화의 법주를 넘어 건축과 닮은 이러한 시도에서 검정은 절대적인 색이었다. 1947년에 피에르 술라주의 회화는 기호의 통합을 주장 했고 그것은 능력과 영감, 리듬과 분할, 어둠과 빛이라는 긴 역사의 첫 구절이었다. 이때부터 제작연도와 크기로 지칭되는 술라주의 그림은 각기 하나의 묘석이 되었고, 그 묘석의 도도한 침묵은 위미들이 와서 형성돠서나 무너지는 이 장소를 만들어냄으로서 세상의 혼란에 대항하였다

 

 

피에르 솔라주, <회화 1956>, MNAM, 조르주 퐁피두센터, 파리, 캔버스 위에 유채,195×130Cm 술라주의 회화는 그것의 모든 물질성의 힘과 있음의 효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정면성에 대한 시선과 곧장 맞서게 되었다. 그의 회화적 성격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흔적과, 그 흔적에 의해 펼쳐지고 진동하고 튀어 오르는 빛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공간 관계들의 리듬’이 덧붙여졌다. 이 공간에서는, 어두운 빛에 의해 잠식된 표면의 여기저기에서 배경의 광채가 뚫고 나왔다. 로제 바이양에게 술라주는 일단 ‘캔버스 위에서 달리기 시작하면’ 그‘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는 한명의 ‘챔피언’이었다. 술라주는 구성보다는 조직에 대해 이야기했다. 구성이란 ‘이미 존재하는 상투적인 요소들로 만들어낸, 부자연스럽고 판에 박혀있으며 미리 계획한 조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릴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우리를 휩쓸어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조직한다. 그것은 조각나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조직한다. 그리도 우리도 조각나 버리자.” Ph. L, Joubert ⓒ Arch. Photeb/T ⓒ ADAGP,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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