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팝아트
팝아트의 시초에는 ‘해프닝’이 있었다. ‘해프닝’은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머스 커닝엄, 음악가 존 케이지, 화가 로버트 라우셴버그가 1952년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만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 ‘퍼포먼스’의 예술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아주 다양한 표현 형식을 뒤섞여 놓았다.
미적인 범주와 전통적인 문화적 위계질서를 동시에 뒤엎기 위해 순간적 효과를 노린 즉흥적 표현들이 앞 다투어 생겨났다.
팝아트의 출현 역시 문화적 위계질서와 미적 범주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당시까지 상극으로 치부되었던 이 두 단어의 조합은 1955년 영국의 미술 비평가 로렌스 엘러웨이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대중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팝’이라는 단어는 1956년 리처드 해밀턴의 작은 콜라주 작품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 작품은 여러 영역을 망라하는 인디펜던트그룹이 런던의 화이트 채플 아트 갤러리에서 개최한 전시회 포스터 초안이었다. 열광적인 야회 축제의 형태를 띤 이 진정한 집단적 퍼포먼스는 매우 냉소적이면서 전조적인 성격을 표명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흥미롭게 만드는가?>라는 긴 제목을 가진 리처드 해밀턴의 콜라주는 가전제품과 같은 기계적 복제 도구들이 부각되어 있는 기발한 재산 목록을 보여주었고 대단한 통찰력으로 다가올 시대를 나타내는 대상과 주제를 처음으로 상세히 펼쳐 보인 것이다.
‘드럭 스토어’의 잡동사니 집합소를 통해 미술은 당시에 일반화된 ‘레디메이드’‘레디메이드’ 제품들의 반미술관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슈퍼마켓의 진열대와 경쟁하게 되었다. 이처럼 멋진 무질서는 소비자-관람자들이 물건들의 근접성, 그리고 먼 곳에 대한 욕구와 동시에 맺고자 시도했던 관계에 반향을 일으킨 건 아닌가 싶다. 따라서 해밀턴은 우스꽝스러운‘실내’를 보여주게 된다. 나체의 여인은 전등갓을 뒤집어쓰고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최초 무성 영화의 ‘재즈 싱어’인 알 존슨은 화면의 크기 때문에 목이 잘려있다. 그리고 재산 목록은 이어져 녹음기, 진공청소기, 아무도보지 않는 텔레비전 수상기와 그 옆에 걸려있는 오래된 만화 광고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위성화상의 대지의 빛을 띤 하늘 아래 놓여 있으며, 주인공인 ‘보디빌더’는 튀어나온 근육을 자랑한다. 소비 사회를 공략하는 정복자의 우스꽝스러운 형상인 그는 손에 커다란 사탕을 들고 있고, 그 사탕에는 보란 듯이 ‘팝’이란 단어가 쓰여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라피티뿐만 아니라 베이컨, 뒤뷔페, 키타이에게서 비롯된 구상의 요소와, 무기력한 듯 교묘한 솜씨로 표현되어 있는 정교하게 현대화된 방식의 연극 전통을 결합하였다. 그의 내밀한 일기를 훑어보는 듯한 그의 그림에는 우정의 대상들이 많이 표현되어 있다. 한가로운 낮의 분위기가 부각되어 있는 그의 그림은 각기 순항함의 선착장이 되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사치, 고요, 그리고 쾌락’으로 보였다. 캘리포니아 수영장들의 호사스러운 내부와 관상용 정원에 모인 그의 친구들 모습에서 배어나는 데생의 가벼움은 그의 개인적인 행복 리스트의 편람이었다. 비벌리힐즈에 호화롭게 은거하던 이 화가는 폴라로이드의 편리함을 이용하여 그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포착해 사진 모자이크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후 그는 10년 이상의 공백을 지나 강렬한 색조로 표현된 장식적 풍경화를 내놓았다.
앤디 워홀은 팝 아트의 스타 자리에 올랐다. 그래픽 아트와 광고에서 출발한 그는 ‘미국산’‘미국산’ 현대성의 거의 신화적 표상으로 매사 미디어의 산타클로스였던 그의 선물 보따리는 만화의 인물과 새롭게 소비의 대상으로 떠오른 매우 규격화된 사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시니시즘을 띠고 노스탤지어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으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간략화라는 방식을 택하여 광고적인 기법과 사물을 고립시키는 새로운 레이아웃과 강렬한 색조를 결합했으며 사물을 거대한 크기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얻어진 효과를 감소시키기 위해 산업적인 실크 스크린기법에 의존, 1962년부터는 아주 기초적인 모습의 회화만이 남았다. 앤디 워홀은 문화적 위계질서의 뒤엎으면서 스스로 ‘기계’이기를 자처하였고, 그의 ‘공장’에서는 영화와 음반, 신문을 비롯해 모든 표현 방식을 뒤섞어놓은 수많은 작품들이 생산되었다.
제임스 로젠퀴스트는 좀 더 확연한 서술성을 보여준다. 그는 브로드웨이의 거대한 광고 간판과 경쟁하는 듯한 작품들을 만들어 일약 거대화의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그림은 오직 시각적인 효과만을 노려 표현을 간소화하는 광고적 기법을 차용한 것이었다. 1965년에 제작한 그의 거대한 그림들 중 하나에는 베트남전에 사용한 유명한 미국 폭격기인 F-111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 폭격기는 실물 크기 그대로 표현되어 거대한 살인 병기의 엄청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많은 미술가는 화화를 버리고 오브제와 설치미술을 택하기도 하였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시선을 끄는 색채의 플라스틱 음식이 놓여있는 제과점과 정육점 진열대 작품을 다수 제작한 후 거대한 오브제에 도전하였다. 그의 아이러니는 빨래집게 형태의 개선문이나 뒤틀려서 반대쪽으로 꺾인 골이 파인 나사못 하나로 이루어진 다리를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엉뚱한 재료들을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사물을 터무니없이 크게 확대시켰다. 그는 두세 개의 담배꽁초가 찌그러져 있는 재떨이도 만들었는데, 이것은 수영장만한 크기였고 별로 쾌적하지 않은 부식된 강철의 색을 띠었다. 또한 그가 만든 화장실 변기는 부드러운 플라스틱의 물렁물렁한 형태 속으로 무너져 내렸으며, 침묵하는 재주 타악기는 헝겊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팝 아트는 환상 없는 삶의 배경을 만들었다. 이 배경 속에서 일상적인 진부함은 디스플레이어의 쇼윈도와 광고 간판에 포착된 모습으로 나타났고 도시적 유희를 점령한 볼거리의 사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림자에 몰두했다.
밀라노에서는 피에로 만초니가 모델의 피부에 직접 서명함으로써 ‘살아 있는’ 조각을 만들었고, 브랑쿠시가 아틀리에를 세웠던 파리의 롱생 골목에서는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래리 리버스, 장 태글리, 니키 드 생 팔이 석고로 덮인 그림에 총을 쏘았다.
이러한 행위들은 장 뒤뷔페가 남긴 “미술은 언제나 약간의 두려움과 약간의 웃음을 주어야 한다.”는 유명한 문구에 대한 예증이었으며, 급변하는 표현 방식에 부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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