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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현대미술: 1950년대 미술 16

by nikaj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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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1950년대 

 

매우 현대적인 1950년대

전후 세계 곳곳은 재건과 소비의 시대로 들어섰다. 원색의 거대하고 호의적인 신호기들이 세워졌으며 그것들은 상상의 세계, 그리고 어린 시절 꿈의 시와 화해와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을 가득 담았다. ‘이유가 필요치 않은 순진무구함의 정반대편에서는 끔찍한 주거용 건물들이 교외의 풍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이 건물들은 아주 능력 있는 건축가들의 현대주의적인 기증주의의 산물이었다. 노동력을 집어삼키는 산업의 비약에 필요한 베이비 붐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것 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소련의 스타하노프 재건 운동가들과도 같은 이들에게 반기를 들고 마르세유의 집합주택’-‘정신 나간 사람의 집이라 불렀던-을 실현하였다. 이 건물의 건축은 온갖 비난과 매우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1946년에서 1952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다. 337개의 복층형 아파트 형태인 이 건물은 23개의 다른 형태에 의거하여 지어졌으며, 1인에서 10

인 가족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건물을 사회적 실험실이라고 규정하였다.

 

반면 1958년 미스 반 대어 로에와 필립 존슨은 철저한 투명성에 의거하여 유리와 강철로 빚은 멋진 평행 육면체인 시그램 빌딩을 세웠다. 파크 애비뉴에 뉴욕 현대 미술관 높이로 건설된 이 건물의 장식을 배제한 기념비적 성격은 광장의 빈 터에 의 돋보이며, 밤이 오면 칸막이 벽을 통해 여과된 내부 조명에 의해 더욱 빛난다. 시그램 빌딩은 바우하우스 최후의 걸작이 되었고 1919년 피카소가 그린 발레 <삼각모자>의 무대 배경이 걸려있는 것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매우 현대적인 1950년대의 서사시는 땅 위에서보다 하늘에서 쓰였다. 1957104일에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되었고, 곧이어 대륙 간 로켓에 의해 추진된 루나 2호가 1959913일 달에 도달하였다. 루나 2호는 이미 10년 전 스탈린에 의해 착수된 것.

 

 

뉴욕

전쟁 기간 동안 유럽의 많은 지성인이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대서양의 다른 한 편에서 페르낭 레제, 피에트 몬드리안, 막스 에른스트,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 같은 거의 신화적인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아테네가 형성.

쿠바인 화가 위프레도 람은 1941년에 브르통과 함께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였는데, 그는 피카소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으며, 원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1943<정글>을 그려 <아미뇽의 처녀들>의 위업을 쇄신하였다.

 

위프레도 람,<정글>,1942~1943년,MOMA,인터 아메리칸펀드, 뉴욕, 캔버스 위에 붙인 종이 위에 과슈. 239.4×229.9Cm 이 선명한 작품은 람이 쿠바로 회귀함을 나타낸다. 이 작품과 더불어 마침내 국제 미술 무대에 제 3세계가 등장했으며, 혼혈종의 세계적 미술이 나타남으로써 기존의 문화적 지형도가 깨지게 되었다. 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여전히 숲의 잔해들을 간직한 채 식물 상태에서 동물 상태로 옮겨간다. 치명상을 입힐 준비가 된 칼은 주의 깊고 불안한 존재가 된다...부드럽거나 잔인한 성은 마치 번개와 같다....” Ph. ⓒ du musée/T ⓒADAGP, 1999

 

 

뉴욕은 훌륭한 실험실이 되었으며 다가올 자유의 형태들이 만들어졌다.

이 국제적 중심에는 잭슨 폴록을 중심으로 하는 뉴욕화파가 생겼는데, 폴록은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들로 그림보다 먼저 대중에게 알려졌다. 폴록은 쇼 비즈니스스타 시스템을 처음으로 미술계에 도입함으로써 제임스딘의 신화를 미리 보여주었다.

현대 회화는 르네상스나 다른 모든 과거의 문화에서 물려받은 형태를 통해서는 비행기, 원자 폭탄, 라디오와 같은 우리 시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잭슨 폴록

지면에서 작업하는 캔버스는 권투의 링과 닮아있다. 액션페인팅”-헤럴드 로젠버그

 

 

윌렘 데 쿠닝은 1904년 로테르담에서 태어났지만1926년부터 미국에서 거주. 그는 매우 도발적인 화법을 구사, 길게 뻗거나 튄 모양들로 캔버스를 얼룩지게 하였으며, 이 모양들은 성적인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 여성의 형태를 흩뜨려 놓았다. 반면 마타와 미로를 사사한 고르키는 암시적인, 무의식의 화법을 선호하였으며, 이 화풍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찬양하던 잡종의 형태가 생겨났다

 

로베르토 마타,<예언자>,1954년,개인소장, 캔버스 위에 유채, 199×295Cm 마타는 1939년 뉴욕으로 건너가 동작의 오토마티즘과 공간적 자유의 방식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기법들은 아주 새로운 미국의 화가 세대에 영향을 끼쳤다. 화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에너지가 중지된 상태의 이 그림은 “원근법을 일종의 미래학으로 대체하고, 동시에 거리의 공간을 의미의 공간으로 대체하고자”한 것이었다. 또한 이 작품은 일종의 즐거운 묵시록이며, 화가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겁먹은 채로’ 그것의 위대한 주관자로 남아있다. Ph. B. Hatala ⓒ Centre Georges-Pompidou/T ⓒ ADAGP,1999

 

액션 페인팅의 추상 표현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바넷 뉴먼과 마크로스코, 클리포드 스틸은 새로운 공간 창조를 시도했다. 색을 통해 얻어진 자율성을 특징 짓기 위해 1962년 그들은 그림에 대해 컬러필드’(색의 장)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넷 뉴먼은 1946년에서1948년까지의 시기에 매우 엄격한 절약성의 스타일을 주장하며 단색조 기법을 중시하였고, 1946년까지 초현실주의에 가까웠던 클리포드 스틸은 미술가가 전적으로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이루 형언할수 없는 행위를 발견. 그 역시 작품의 매매와 전시에 관한 엄격한 통제로서 거대한 크기와 한없이 넒은 채색 표면을 선택헸다.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했던 마크 로스코는 거대 작품들을 만들어냈는데 광휘를 띠는 채색과 달콤한 재료의 부드러운 접합을 이루어 자유로운 추상표현주의를 구현했다.

 

잭슨 폴록과 로버트 머더웰을 거쳐 온 절대적인 색은 새로운 추상의 원동력

이 새로운 추상은 1963년 애드 라인하르트가 시도한 검정 위의 검정회화라는 극단적 실험으로까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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