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 형태 :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천재적 화가였던 파블로 피카소는 그 누구보다도 20세기의 구상 언어를 크게 혁신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혁신은 특출한 습자 재능과 결부된 시각의 날카로움, 또한 고갈되지 않는 창조력에 의해 가능했다. 그는 표현의 모호성에 관한 분석을 심오한 경지로 이끌었다.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남
1901년 1900년 파리에 도착하여 1904년까지의 ‘청색시대’를 구성하는 우수가 깃든 표현주의적인 그림들을 제작함. 청색 시대는 1905~1906년의 ‘장밋빛 시대’로 이어진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시켰으며, 이때부터 입체파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피카소는 입체파의 형식적 구조를 규정하였고, 이 구조는 그의 평생 동안 성찰의 체계 역할을 하게 된다. 바토라봐르에 있던 그의 아틀리에는 거트루드 스타인, 후안 그리, 마르쿠시스,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등 친구들과의 열렬한 토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그의 조각 <압생트 잔>(MNAM,파리)이 첫 번째 ‘레디메이드 작품이 되었다. 이는 미술작품의 투명성에 관한 기나긴 성찰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성찰은 이후 나움 가보, 앙투안 페브스네르 같은 조각가들에 의해 되풀이된다.
1915년 여전히 입체파적인 변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종의 사실주의 쪽으로 전환하였다. 이 사실주의는 1919년 런던에서 확고히 정립되었다. 한창 고전적 근원으로 회귀하려는 참이던 드랭과 만난다. 야성적 서체와 미노타우로스 같은 신화적 형상의 표현을 통해 발레 뤼스의 무대 배경을 혁신하였다.
1916년 파리에서 겪은 1차 세계대전 후, 곁에 남은 친구는 후안 그리와 막스 자코브뿐이었다. 아폴리네르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1920년 조각적 정적 초시간적이며 거대하고 우수가 깃든 데다 황토색과 회색의 담백한 색계로 표현된 형상을 통해 로마와 그리스의 고대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이로써 그의 작품은 질서로 회귀하는 선의 단조로움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선의 역동적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항구적 경향으로 남게 된다.
1923년 앵그르의 양식과 흡사한 비장미를 띤<아를르캥>(MNAM,파리)연작 등, 정교한 초상화들을 그리려고 시도하였다. 신고전주의적 신입체파적인 환각 작용과 사교계적인 성격을 띠었던 막스 자코브의 표현에 따르면 ‘공작부인의 시기’였던 이 시기는 지속되지 못했다. 피카소의 삶과 작품은 정치적 예술적 개인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맹렬하고 타협 없는 하나의 확신이자 관습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1925년 그의 작품은 일종의 단절을 맞게 된다. 이 단절은 1928년 초현실주의의 영향에 의해 부각되었다. 초현실주의는 그로 하여금 이미지의 이중적 의미에 관한 성찰을 심화시키게 하였다. 이때부터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적으로 바라본 인간 형상의 해체와 공간의 이질성, 그리고 색의 날카로운 강렬함이 그의 독창적 스타일을 확립하게 된다. 이 독창성은 특히 색종이 콜라주를 통한 기표-기의의 놀이와 모방에 대한 모방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완전한 추상으로 까지 변화해 가지는 않았다.
1930년 말과 미노타우로스의 신화적 형상, 울고 있는 여인들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빈번한 제가 되었다. 스페인에 마지막으로 두 번 체류하였으며, 그 이후 그의 열정적 기질은 심각한 긴장을 겪었다.
1937년 수난을 당한 바스크 지역에 헌정하는 걸작 <게르니카>를 제작함.
1940년 독일군 점령동안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면서, <여명악>(1942년, MNAM, 파리), <납골당>(1945년, 개인 소장)과 같이 빛바랜 듯한 색계로 표현된 극적인 작품들을 그렸다. 이 작품들에서, 해체되고 불안감을 주는 인간 형상은 실내의 불길한 분위기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실내에서는 가정의 평범한 일조차 가장 큰 위험을 띠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중에게 그다지도 충격을 안겨 주었던 피카소의 작품들은, 20세기 전반기에는 엄습한 혼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예견하게 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상적이고 경쾌한 것이 아니라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에서 드러나는 실존주의 철학처럼 시대에 참여하고자 하는 미술의 역할을 밝혀주었다.
1944년 공산당에 가입하고 프랑코가 독재를 휘두르는 한 조국 스페인에 다시는 돌아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을 지킨다.
1945년 남프랑스에 정착하여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여전히 입체파의 방식에 따라 인간 형상을 표현했으며, 자연에 대한 새로운 조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조각과 도예를 다시 시작하고 조각-아상블라주를 고안하였다.
1965년 입체파의 원칙들과, 인체에 관해 재발견된 관능적 서정성의 독창적 결합을 실현시켰다. 또한 들라크루아와 마네, 벨라스케스, 푸생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1968년 포르나리나가 그려진 일련의 데생을 통해 라파엘로의 이상적 미술을 패러디하였다. 이는 사랑의 쾌락과 ‘그것을 초월하는 예술’(코르들리에(D.Cordellier)「라파엘로」,『전시회카탈로그』,1983년, 그랑팔레, 파리)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1973년 무쟁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막대한 양의 판화와 데생, 회화를 제작하였다. 이중에는 탐색하는 시선을 지닌 일련의 자화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1981년 9월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게르니카>가 프랑코 사후 스페인에 반환되었다. 피카소는 공화국이 복귀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작품을 스페인에 보내지 말라고 요구한 바 있다. 이러한 소망이 실현된 것은 민주주의의 복귀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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