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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근대미술: 형태 5 (소용돌이파 etc)

by nikaj 2024.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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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형태

소용돌이파

반항 미술 센터에 ‘기독교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붙인 에즈라 파운드는 사실상 몇몇 멤버로 축소된 한 운동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는데 그 운동에 ‘소용돌이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틴어 보르텍스(vortes)에서 유래.
소용돌이파 선언은 1914년 6월 이 운동의 잡지인 《블라스트》 첫 호에 실림.
소용돌이파의 작품들은 곡선과 파선의 뻗어나감에 의해 변형된 입체파적인 형식목록에 의해 특정 지어졌다. 나선의 회전력은 중심에 있는 소용돌이를 통해 역사의 격렬한 동요와 유사한 소용돌이 효과를 창조.
그러나 입체파보다 훨씬 일관성과 깊이가 부족했던 소용돌이파 운동은 전쟁에 의해 사라지게 됨.
 

미래파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치적, 문화적 무기력에 대항하고 19세기 중반 독립 투쟁 때의 역동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노력을 결집.
 
기존의 가치를 공격하며 ‘건강한’ 언어적 · 문화적 공격성을 통해 이탈리아를 진보적인 유럽에 합류시키기 위한 새로운 강령들을 제시.
‘건강한’ 공격성이란 도시, 기계와 속도, 당시에 “<사모트라케 섬의 승리>보다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경주 자동차의 시대에 대한 옹호를 의미.

▲<사모트라케 섬의 승리>:헬레니즘 시대의 대리석 조각으로 1863년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되었다. 뱃머리에 내려와 서 있는 날개가 달린 승리의 여신을 표현하고 있다.(B.C190년경, 루브르 박물관)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에, 간섭 주의적이며 이후에는 파시즘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입장과 전쟁 옹호는 모딜리아니나 키리코 같은 미술가들로부터 불신과 가혹한 비판을 야기.
 "미는 투쟁에서 태어나는 것" - 마리네티
미래파의 양식은 면들이 상호침투와 동시성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 그 점에서는 입체파와 유사하나 시간과 속도에 관한 운동학적 주제화를 암시하는 형태의 베가와 증식은 작품의 중심에서 관람자를 끌어당겨야만 했으며, 이는 회화의 시, 연극에도 마찬가지였다. 미래파는 무엇보다도 행동미술이고자 했기 때문.
 

러시아 아방가르드

러시아에서 1905년~1907년의 혁명과 발맞추어 전개된 아방가르드 미술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연구들의 깊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역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애초 유럽 미술에 압도당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그 스스로 유럽 미술에 박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구축추의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와 같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술 사조들의 토대가 되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카타르시스로서의 예술이라는 이상적 역할을 문제 삼았다. 예술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협받는 조화와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절이 표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정치적 갈등에 참여함으로써 20세기 초의 되돌릴 수 없는 혼란들을 반영하고 또한 뛰어넘는 것.

   ▲구축주의: 1913년 러시아 혁명기에 형성된 미술운동. 미술이 현대 과학기술의 형태와 과정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각은 산업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여 ‘구축’되었고, 회화에서는 추상 형태들이 기계문명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이나 건축적 양식을 이루면 공간에  떠있다.
 

카지마르 말레비치 &lt;호밀수확&gt;,1912년, 스테델릭 미술관, 암스테르담 노동의 세계에 바쳐진 이 그림에서, 직선원근법이 결여된 공간은 러시아 입체파-미래파의 법칙들에 따라 대조적인색의 반원형 입체로 표현되었다. 인물들은 금속성을 띤 다발들의 면과 동일화 되어있으며, 이탈리아 미래파 작품들과는 달리 전혀 감정적 요소가 드러나 있지 않다. 새로운 인간은 스스로 기계 속에 통합됨으로써 기계를 능가하고 지배한다. 말레비치는 정적인 방식으로 기계를 표현하면서 이탈리아 미래파가 사사한 현란한 움직임을 배제하였다. 말레비치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 주인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자연의 손길을 추방하여야한다." Ph.ⓒ Colorprint Hinz- D.R/T

 
러시아 아방가르듣 미술가들은 이탈리아 미래파와 입체파, 야수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았으며,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접하였던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이 미술가들이 작품에서 주는 교훈을 흡수하였고, 뒤이어 중요한 일련의 전시회들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확고히 함으로써 대가들로부터 해방되었다.
 
191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다이아몬드 잭' 전시회는 서구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러시아 미술 운동을 드러내고 정의함. 대중은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말레비치의 작품들을 볼수 있었다. 말레비치는 타원형의 절단면들에 기초한 공간 속에 , 과장되게 커다란 손발을 가진 거대한 인물들을 그려냄으로써 노동의 세계에 대한 표현에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대다수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말레비치 역시 정치적으로 명확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1905년 혁명에 열렬한 관심을 표명하는 볼셰비키 체지의 방식에 찬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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