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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근대 미술: 추상 7 : 청기사, 바우하우스 외

by nikaj 2024.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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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추상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빌헬름 보링거는 1908년 저서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이미지로 장식된 세계의 혼돈과 암흑 한가운데에서 유일한 휴식의 가능성으로서의 순수한 추상을 지향하는, 그리고 본능적 필요성에 의해 그 자체로부터 기하학적인 추상을 창조해 내는 본원적 성향”을 언급하였다. 20세기 가장 의미심장한 혁명들의 완성인 추상은 1910년대 발생한 미술적 동요를 제압하고 온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빌헬름 보링거 (Wilhelm Worringer, 1881~1965) : 독일의 미술사가. 고대 이집트나 궁세 고딕 미술에도 서구적· 고전적 미술과 다른 독자적 미와 가치가 있음을 논증하였다. 그의 ‘추상충동’에 대한 설명은 현대미술 이해에 큰 의의를 가짐.

 

청기사

 
칸딘스키는 르 포코니에, 가브리엘 뮌터, 그리고 특히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 그룹을 결성. 이 명칭은 칸딘스키와 청색과 말을 매우 좋아했던 마르크와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
칸딘스키는 그림에 <인상>, <즉흥>, <구성>등 비지시적인 제목을 붙였으면, 단지 순차적인 번호로만 그것들을 구분하였다. 그는 구성 속에 그랙픽적이고 위치가 이동되어 있으며 ,마티스의 작품에서와는 반대로 서로 독립된 요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원적 체계를 도입하였다. 그는 선에 대한 엄격한 연구를 통해 이 시기 추상 화가들의 강박관념이었던 장식미술에서 벗어났다. 그의 최우선 성향이었던 음악, 특히 12음 기법은 그의 삶에서 항구적 경향이 되었다. 그는 얼룩, 우주적 혹은 생물적 유기체 형태의 모티프들을 반복하거나 무중력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회화적 형성요소와 음악적 형성요소의 등가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2음 기법 : 1옥타브안의 12개의 음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이를 바탕으로 악곡을 구성하는 방법. 최초에 정한 음렬은 악곡 전체의 기초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1곡에 대해 12음렬은 1개이며, 이를 원형태라고 함. 1921년 쇤베르크가 창안.
 

바실리 칸딘스키,&lt;구성Ⅶ을 위한 초벌그림 2, n⁰182&gt;,1913년, 시립미술관 렌비흐하우스, 뮌헨. 이 작품은 칸딘스키의 최우선적 성향인 음악을 연상시킨다. 그는 선과 색, 그리고 음악 사이의 등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후 역시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는 작곡가 쇤베르크는 이 작품에서 12음기법과의 대비를 발견하였다. 입체파시기를 겪지 않은 드문 추상화가들 중 하나였던 칸딘스키는 대상에 대한 어떠한 집착도 내보이지 않았다. Ph.ⓒJoachim BlauelⓒADAGP, Paris 1998/T

 
칸딘스키와 마르크는 예술의 미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서정성과 자연을 향한 감정이입에 대한 충동을 통해 그 믿음을 표현함. 칸딘스키는 정신적 인간에 대한 감정이입을, 마르크는 실제의 자연과 동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표현.
 
1차 세계대전은 청기사 그룹의 분산을 가져왔으며, 가장 뛰어난 영감들을 분쇄시켰다.
 

바우하우스

 
미술공예운동의 창시자였던 윌리엄 모리스를 계승한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수공업을 화해시키고자 하였으나, 기계의 유용성과 기능적 정확성 역시 수용

▲미술공예운동 : 19세기 말 영국의 공예운동. 산업혁명 이후 물건들은 기계로 대량 생산 되었다. 모리스는 이러한 기계만능주의가 결국 생활 속의 미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로 가구· 직물· 제본 등 여러 응용 미술 분야에서 중세 직인제도에 따른 수공예 개혁을 기도하였다.

 
클레와 칸딘스키는 미술작업에 있어 추상화 역시 필수적인 과정이라 여겼다. 그들은 “예술은 창조의 잠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젠가는 예술이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는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조형주의

 
20세기 초에 나타난 추상에의 열망은 1913년 피터 몬드리안의 작품 속에서 결집되고 합리화되었다. 그는 아카데미즘과 점묘화법, 야수파, 표현주의, 그리고 입체파의 영향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자발적 기작은 색채의 비현실성과 <나무>연작의 한정된 주제를 통해 표현되었다.
 
1918년 11월에는 「최초의 신조형주의 운동 선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선언은 반 되스부르크와 반통걸루가 서명한 것이었으면 즉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신조형주의 생성에는 7년이 소요되었으며 그 법칙들은 엄격히 규정되었다.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의 첫 번째 원칙에 따라 입체감을 파괴하려 애썼다. 
“조형적 수단은 무채색이 아닌 원색으로 이루어진 직각의 면과 프리즘이어야 한다. 건축에 있어 빈공간은 무채색에 해당한다. 그리고 물질은 유채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조형주의의 법칙에 따르면 건물들은 공간의 균형 잡힌 관계를 위해 직각 면들로 구성되어야 했으며 불변하는 요소, 직각에 대한 순수한 표현이어야 했다. 이 새로운 질서는 지적 활동에 몰두하기 위해 기계의 도움을 받는데 주저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게 되었고 신조형주의는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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