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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근대미술: 형태 4 : 입체파

by nikaj 2024.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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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형태

입체파와 미래파, 절대주의자, 구축주의자들은 형태의 재구성을 통해 이전의 운동들이 진행해온 색에 의한 형명의 성과를 심화함.

역사상 처음으로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도입.

 

아방가르드: 군대용어로 전투의 선두에서 돌진하는 부대를 뜻함.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정당을 지칭. 이것이 예술에 전용되어, 끊임없이 미지와 대결하며 기존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키는 혁명적 예술 활동을 뜻하게 됨.

 

입체파

 

입체파는 1907~1909년의 세잔풍 입체파, 1910~1912년의 분석적 입체파, 1913~1914년의 종합적 입체파라는 세 시기를 거침. 1912년부터 전개된 오르피슴과 소용돌이파는 입체파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되었다. 대부분의 입체파 미술가들은 조르주 브라크처럼 야수파 시기를 거쳤다.

 

입체파는 1907~1914년까지 프랑스에서만 전개되었으나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심지어는 외화 미술계 외부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회화 혁명 중 가장 뚜렷한 요소인 추상은 거의 전적으로 입체파에서 영감을 얻었다.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 전시회에서는 프랑스 미술과 세잔, 입체파 , 다다이즘, 그리고 뒤샹 형제의 작품이 부각됨었다. 그 중에서도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년, 필라델피아 미술관)는 파문을 일으켰다.

 

입체파라는 환원적 조형언어의 형식 레퍼토리는 일련의, 혹은 복합적인 비대칭 형체에 근거한 많은 다면체로 형태를 해체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면들과 직각적이고 비스듬한 주조의 혼합, 상반되는 리듬, 색계와 주제의 축소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이 레퍼토리는 정물화나, 그 와 동일한 부속물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통해 외부의 광원이 배제되어 있는 성찰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입체파 미술가들은 미술작품을 자연과 평행을 이루는 하나의 조화로 간주한 세잔의 견해을 이어받아, 르네상스 회화로부터 물려받은 환각적 효과를 무효화함으로써 가물의 자연적 모습으로부터 표현의 방식을 분리시켰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미술작품의 독립성을 더욱 확고히 하기위해 미리 결정된 구조들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역동성과 관접의 동시성의 원칙들을 통해 그 구조들에 생기를 부여하였다.

 

입체파는 여전히 주체-대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 관계는 이후 추상에 의해 폐기되었다. 분석적 입체파의 초상화 및 구성의 미는 기하하적 결정면들의 배치에서 태동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치는 매우 강한 형식적 엄격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 엄격성이란 요소들의 대조 자체에서 비롯되는 통일성과, 순수하게 시적인 하나의 질서에서 발산되는 듯한 회색과 베이지색, 갈색 등 투명한 단색조들의 간결한 엄격성을 의미한다.

조르주 브라크,<포르투갈 사람>,1911년 바젤 미술관. 이 그림은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순수한 시기에 속한다. 인물들의 주요 형태는 아직 식별이 가능하다. 한편 형상의 해체와 갈색 및 회색의 색조로 그려진 기하하적 요소로 해체된 배경을 통해 그림 전체는 놀라운 동질성을 보여준다. 브라크는 처음으로 형지로 뜬 문자와 숫자들을 도입하였다. 그는 이 문자와 숫자들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기호들 자체의 형태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는1912년의 파피에 콜레 작품들을 통해 이 시도를 계속해 나갔다. Ph.ⓒLauros-Giraudon ⓒ ADAGP, Paris 1998/T

 

 

"미술에 있어 유일한 오류는 모방이다." - 글레즈와 메챙제

 

입체파는 조각 분야에서도 눈부시게 전개되었다. 레몽 뒤샹 비용은 묘사적인 세부를 제거하고 기계회된 형태의 추상을 이룩하기 위해 인간이나 동물 모형의 표현을 연마하였다. 아르키펭코 <천을 걸친 여인> (1911년, MNAM, 파리)과 같은 조각들의 의고주의적 양식화는 입체파의 형식 레퍼토리에 깊이를 부여하였으며, 오토구트프로인트와 오십 자긴은 작품의 형상 속에 표현주의적 요소들, 운동이나 음악을 연상시키는 특성들을 통합시킴으로써 입체파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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