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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현대미술: 세기말 2 : 뉴욕 외 22

by nikaj 202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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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세기말 2

 

뉴욕 이미지

 

세기말 다시 전통적인 회화로 돌아가려는 흐름에서 미국의 미술계도 자유롭지 못했다. 전통적인 미적 범주와 결별하겠다는 몽상은 더 이상 회젯거리가 되지 못했고 스펙터클사회의 주도자이자 볼모였던 뉴욕의 화가들은 차례로 서술과 연극적 이미지에 의존하게 되었다.

 

70년대말 나타난 키스 해링과 장 미셸 바스키아는 표의 문자 및 거리나 지하철의 그래피티로 솜씨를 겨뤘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격렬함이 아님 보편적 동기로 사용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자신의 각각의 작품에서 ‘80%의 분노를 보장했다. 환각에 빠진 해골들에 사로 잡힌,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열광은 단지 7년간만 지속되었는데, 그 기간은 미술계를 요란하게 흔들고, 세상을 뒤집고, 여러 기준과 문화 사이를 오가고, 숨가쁜 리듬으로 그림을 그린, 시간이었다. 어느 여름 밤 그는 27세의 나이에 약물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고 키스해링 또한 31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장 미셸 바스키아, <붉은 얼굴>, 1981년, 개인소장, 파리,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245×153 바스키아는 아이티 이주민의 아들로 뉴욕 브룩클린의 빈민구역에서 태어난 흑인이었다. 그는 곧 이름을 날렸는데, 오히려 ‘Samo’라는 고유명으로 더욱 알려졌다. 그는 영광스러운 월계관을 쓰고 갤러리 구역과 지하철을 침범하는 보복적 그래피티 작품에 서명했다. 뉴욕 전체가 단어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야만적이며 열광적인 그의 그림에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따라서 1982년부터 그는 자잘한 작업들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미완성인 자신의 성급한 그림들처럼 바스키아는 너무 강렬하고 빠르게 살았다. 그는 28세가 되기도 전에 약물과다 복용으로 사망하였다. Ph.ⓒdu collectioonneur/T ⓒADAGP,1999

 

 

독일의 신표현주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독일 회화의 자신만만함은 독일 자체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독일은 산업적, 상업적 발달을 완수했고 독일 회화는 자연스럽게 표현주의와 서술 및 표현의 즐거움을 지향했다. 표현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유일하게 기준을 삼은 것은 결코 어떤 유파나 정확한 스타일을 구축한적 없었던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였다.

 

안젤름 키퍼는 가장 도발적인 미술가였는데 보이스의 제자였던 그는 유태교 신비 철학과 성서, 2차 세계대전의 역사 속에서 모호한 신화의 요소들을 길어 올렸다. 그는 주저 없이 끈질기게 북구의 신화와 민족적 사회주의의 결합을 되살려냈다. 그는 두텁고 풍성하며 진흙 같은 재료 속에 뿌리박은 영웅적 회화를 제작했다. 이런 회화는 건국 신화의 요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었는데 오래된 숲 아래 난 오솔길이나 땅과 뱀, 무덤, 불꽃으로 이랑 진 고랑의 모습을 표현했고 교육적 면모를 강조해 이야기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는 좀더 고전적이고 질서 정연한 궤적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끌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파낸 커다란 목판화 작품들을 만든 후, 거대한 형상과 죽은 나무로 잠식된 육중한 회화 연작을 자수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의 회화적 질감이 주는 불투명성은 점차 밝아져,<영웅>을 상징하는 형상을 묘사한 거만한 몸짓의 투명성에 다다랐다. 그리고 1969년부터 그는 거꾸로 된이미지를 표현하였다. 이처럼 전도된 형상의 모습은 바젤리츠의 유명한 이미지를 확립시켜 준 괄목할 만한 방식이었다. 또한 이와 같이 이미지는 격렬한 기호와 생생한 색으로 이루어진 광기 같기도 했다.

 

이런 회화는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이기에 더욱 도발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격렬함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직접 깎아 내기 방식으로 만든 그의 조각들뿐이었다.

그의 조각은 도끼로 나무를 쳐서 조잡한 덩어리에서 형상이 나타나게 만든 것이었다. 급히 칠한 다색으로 장식된 이 형상들은 거칠고 비장한 모습을 띠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 <무제, 16, Ⅳ>, 1987년, 보부르 갤러리, 파리, 캔슨지 위에 목탄과 파스텔 및 유채, 270×151Cm, 게오르크 바젤리츠는 1969년부터 형상을 거꾸로 놓았는데, 이는 오직 회화적 요소들만을 통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표현주의적이라기보다는 도박적인 그의 회화는 다양한 영향력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의 회화 속에는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과 셰삭의 조각, 통속화, 19세기 독일 회화, 그리고 에밀 놀데와 에드바르 뭉크, 나아가 바젤리츠의 동료인 펭크회화의 영향이 나란히 나타나 있었다. Ph. ⓒde la galer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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