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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현대미술: 세기말 4: 건축 외 24

by nikaj 202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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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세기말

건축

 

"나는 미술적 시스템에 속해 있는 예술적인 건축가와는 정반대다. 건축가란 최선을 다해 주문에 응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현실과 원형, 혁신의 테두리에 위치해야 한다." -장 누벨 

 

장 누벨의 건축 설계에서 잠제성과 무대적 장치란 즐거움의 개념 즉 '감동을 일으키고 특수한 상황 속에 인간을 위치시키는 기법'과 결부된 것. 1989년 착수한 그의 <끝없는 탑> 프로젝트는 매우 날렵한 모양의 사무실 빌딩을 건축하기 위한 것으로, 높이 400m의 이 건물은 마치비물질성을 향한 레이스를 벌이는 듯한 특징은 띠었다. 10대 1의 비율 속에 솟아 난 신비스러운 동경을 담은 <끝없는 탑>은, 라 데팡스의 역사적 현장에 자리 잡아 국립 공업 기술 센터 (CNIT)와 스프레켈손의 아치가 보유하는 기록에 덧붙여 세계에서 네 번째 가는 기록을 라 데팡스에 더해주게 될 것.

 

"이 역사적 레이스는 늘 투명성만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한계의 부재를 겨루는 게임" -장 누벨 \

 

장누벨과 엠마누엘 카다니, <끝없는 탐> 모형, 1989년, 파리라 데팡스의 국립 공업 기술 센터 바로 옆, 이그랑드 아르슈 뒤편에 지어질 이 탑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그리고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고 가장 날씬한탑이 될 것이다. 이 건물의 건축적 위업으로 꼽을 수 있는것은 무엇보다도 직격 40미터, 높이400미터의 1대10비율이다. 이<끝없는 탑> 의 기저부분은 검은색이며, 미세한 그라데이션에 의해 위쪽으로 갈수록 점점 밝아져 구름이 닿는 꼭대기 부분에서는 완전히 투명해진다. 밤이 되면, 얀 케르살레의조명으로 이 도전적 작품의 과감성과 지적특성이 강조된다. Ph.ⓒ G.Fessy/TⓒADAGP,1999

 

 

노먼 포스터는 벅 민스터 풀러와 함께 일하기도 했던 영국 건축가로 그는 월트셔주 스윈던에 르노사의 유통 센터를 건축하게 위해 1981년 넓이 24㎡, 꼭대기 높이 9.5m의 모듈을 구상. 이 모듈은 16m높이의 마스트에 매달려 있으며, 르노사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이런 방식을 통해, 이 건물은 그곳에서의 활동을 중단시키지 않으면서 땅의 기복과 필요한 확장에 모두 들어맞는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정밀하고 내구성 있는 기계장치로서 산업용 건물은 여기에서 고능률적 특성의 이미지를 명료하고 정교하게 드러내 주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적 운동의 원형에 대한 아카데믹한 거절,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나 바우하우스 유산의 현신에 대한 격렬한 반발의 최종적 결과로서 정의 내려짐.

 

"현대건축은 1972년 7월15일 오후 3시 32분에 미주리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죽었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는 팝아트의 카탈로그를 논거 삼아 가장 통속적인 상업 건축을 찬미했으며,  미국에서 앨리슨 스카이와 제임스 와인즈에 결성된 그룹 사이트는 '공공 미술'을 지양했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는 특히 아름다운 건물을 선호하였는데, 아름다움에 치중한 외양을 통해, 건축물은 즉각 가장 순응주의적인 전통의 계보 속에 속하게 되었다

 

리카르도 보필은 스탈린주의적 제작 취향으로  '대중을 위한 베르사유궁'을 늘려가, 파리 몽파르나스역 뒤편과 마른 라 발레, 생 컹텡 앙 이블린, 몽펠리에에도 세워졌다.

 

가에 아우렌티는 19세기 미술관을 오르세역에 세우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이 곳에는 4000점이 넘는 다양한 규모의 엄청난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었다. 아우렌티는 이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걸맞은  웅장하고 방대한 내부 장식을 창조해 냈고 내부 건축과 전시 작품이 서로 맞먹는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이 되자,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부정적 유토피아로서의 해체는 1920년대의 러시아의 유토피아를 정반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미완성'건물을 통해 도시들의-중심이 없는 LA모습과 같은-혼란과 맞섰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재료들을 사용하고 , 콜라주 기법처럼 이런저런 사물을 나란히 늘어놓았으며 평범한 것을 유희적으로 재활용했다.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은 풍경이나 도시의 배경 속에 자리 잡은 강하고 단순한 입체의 효과와 더불어 '미니멀'한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마리오 보타는 원기둥 형태와 시간을 초월한 기념비성에 애정을 쏟았는데, 이러한 특성은 주문제작된 루가노 호숫가의 호화로운 개인 주택들과 1988년 완공된 비외르반의 미디어테크, 또는 논란을 일으켰던 에브리의 성당 설계에 적용되었다.  원기둥 형태는 보타가 1982년에 제작한 <의자 nº1>의 등받이를 고정시키는 데에도 사용되었었다.  이 등받이는 팽창된 폴리우레탄 소재의 회전식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리오 보타는  '발명이 아닌 구성으로서 건축'이라는 루이스 칸의 교훈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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